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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원주한살림의 소모임으로 생명공부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모월산공부방입니다. 지난 토요일인 31일, 원주한살림 무실매장 2층 조합원 활동실에서는 <한살림선언문 잡담회> 2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여덟 분의 선생님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새로 두 분의 선생님께서 찾아주셨고, 자유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참석한 조합원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시간은 지난번에도 알려드렸듯이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선언문을 보며 당시의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지성사·사상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과학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근대적 신념을 반성했습니다. 또한 뉴턴의 물리학으로 일컬어지는 고전역학의 한계를 보았으며,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으로 구축된 존재론이 결국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반생태적 자연관임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단편적인 전문화와 맞물려 수량적인 추상화를 토대로 한 직선적인 경제이론까지 살펴보았습니다. 1장에서는 산업문명의 위기로 불거진 현상을 다루었다면, 이번 2장에서는 위기의 현상들, 그 너머의 근원이 되는 사상과 문명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이어졌습니다.

한살림선언문의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장을 읽은 이후에 당시 선언문을 쓰셨던 어르신들의 정의에 대한 투철한 고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정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디케(dike)나 유스티티아(Justitia)라고 불리는 정의의 여신을 떠올리지 않나 싶습니다. 저울과 칼을 양손에 들고, 눈가리개를 한 이 정의의 여신은 서로 얽히고 얽혀서 본래의 줄기를 찾기도 어려운 칡넝쿨과 같은 상황 속에서 저울의 엄정하고 엄격함, 칼의 단호함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눈을 가렸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상징화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정의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떠올려볼 때, 디케는 어떤 모습이고, 유스티티아는 어떻게 그려질까요?

원주그룹의 한살림선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정의를 고민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것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시대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가슴 조렸던 때입니다. 이때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생명운동을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선 두 문장을 허투루 넘겨 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흡사 변절자라고 비판과 비난했던 분위기속에서 당당히 꺼내든 한살림의 기치는 정치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불평등 역시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했던 새로운 문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현상들 그 너머의 오늘날 문명에 대한 진단은 서양근대의 통렬한 반성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 뉴턴의 물리학, 존 로크의 사회사상이 담긴 서양 근대의 위대한 시작은 원주그룹에 의해서 우리가 극복해야할 ‘기계론적모형의 이데올로기’라는 과제가 어느새 되어 버렸습니다. 이 기계론적 세계관은 결국 인과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과론은 동일률과 배중률을 토대로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는 결국, 원인에 따라 결과가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장의 가격입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고, 이러한 가격은 시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게 된다는 어느 영국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상식중의 상식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꺼내든 “한살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한살림의 정의는 조금은 달랐습니다. 필요로 하는 자와 공급하는 자의 삶을 보았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농가에서는 먹을거리(농산물)에 대한 농부의 정성을 흘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서로 얽어서 하나로 매듭을 지었습니다. 바로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의 한살림으로 말이죠. 서양의 문명으로 이룩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었으며, 법치주의의 사회의 시스템이 오늘날 인류의 번영을 낳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오히려 인간은 소외되어 갔습니다. 더욱 더 피로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놀랍게도 한 세대이전에 원주의 사람들은 사회와 경제의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사랑’이라는 정의를 꺼내놓았습니다.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흔히들 「한살림선언」(문)은 한살림의 정신이고 한살림의 뼈대라고 일컬어지곤 합니다. 그만큼 생각을 압축하고, 단어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고민한 결과물이라는 말일 테지요.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보면, 뼈대라는 수식어는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하고 굽히지 않는 이미지로서 뼈대라는 생각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한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 사랑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가슴 뜨거웠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단단하고 건실 하다기 보다는 세월이 흘러도 왜곡되지 않고, 오해되지 않게 다듬고 또 다듬은 연한 심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식물로 비유하자면 ‘고갱이’라고 하나요. 풀이나 나무의 줄기 한 가운데 있는 연한 심 말입니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한살림의 정의에는 뼈대라는 말보다는 고갱이가 더 어울릴 듯합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가족을 살리는 살림꾼과 농업을 살리는 살림꾼을 특별히 조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소외 되지 않도록, 모두 다 살리고자 했던 뜻을 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다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의 마음을 정의로 구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원주사람들의 속 깊은 뜻을 「한살림선언」을 보며 이제야 조금씩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두 장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날 산업문명의 위기를 짚어보고, 진단을 했다고 할까요. 앞으로 살펴볼 내용은 앞선 진단에 대한 일종의 처방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제시하고자 새로운 세계관을 다룰 예정입니다. 말이 길었습니다. 한살림을 이용하시는 조합원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 9시 30분, 원주한살림 무실매장 2층 활동실에서는 <한살림선언문 잡담회> 세 번째 만남이 있을 예정입니다. ‘생명의 창조적 진화’라는 3장을 강독할 예정인데요, 관심 있는 조합원님들의 참여를 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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